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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프랑스에 멈추다 -파리- PART 4 20200109TRAVEL 2022. 11. 16. 16:03
파리에서 원한다면 하루 종일 예술을 관람할 수 있다.
그만큼 명작(?)들과 전시관이 많다.
그러나 예술분야에 종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미술관에서 하루를 보내는 건 지루할 수 있다.
그렇다고 예술의 도시인 파리에서 미술을 보지 않는 것은 여행의 한 가지 재미를 놓치는 일이 된다.
필자는 우울하고 조용한 아침을 깨우는 방법으로 미술관을 활용하였다.
약간만 늦어도 긴 줄을 서야 하기 때문에 좋은 방법이다.
이른 아침 파리의 직장인들과 같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세계 어딜 가나 비루한 노동자들의 삶이 그려지기도 한다.
프랑스의 노동권과 한국의 노동권은 현저히 다르지만 프랑스에서도 일자리에 대한 갈등은 팽배하다.
골치 아픈 사회문제는 이쯤에서 생략하고 오늘은 오르세 미술관을 갔다.
'오르세 미술관'
파리의 오래된 건축물과 마찬가지로 현재 오르세 미술관은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
1804년 최고재판소로 세워져 오르세 궁전이라 불렸다가
1871년 파리 코뮌(노동자 혁명 정부) 당시 불타버렸다.
1900년 파리 박람회를 위해 기차역으로 재건된 후에
1939년 시설 낙후와 위치 선정의 이유로 폐쇄된다.
미술관으로 탈바꿈한 때는 2차세계대전 이후이다.
1986년 미술관으로 재탄생하였다.
'오르세 미술관'
애당초 기차역으로 사용되었다기보다
기차역 콘셉트의 미술관 같다.
'폴 세잔 ;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 -상단-'
'조르주 쇠라 ; 서커스 -하단, 왼쪽-'
'에두아르 마네 ; 피리부는 소년 -하단, 오른쪽-'
오르세 미술관은 인상주의와 후기 인상주의 작품이 많다.
시기로 말하면 19세기 중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유행하던 화풍이다.
낭만주의 사조와 괘를 같이하며
철학, 윤리 등 형이상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정치, 제도 등 현대인의 행동양식을 변화시켰다.
필자는 폴 세잔의 작품을 좋아한다.
그냥 보면 별 거 없이 보이지만
폴 세잔의 그림은 실재론에 입각하여 그려졌다.
예를 들면 인간의 눈은 수평을 인지할 수 없는 구조다.
수평선을 보면 연속적으로 이어진 것처럼 보인다.
수평선이 수평하다라고 느끼는 건
우리의 뇌에서 맹점을 보완하기 때문이다.
즉 수평선을 그릴 때 평행하게 그리려고 하는 건
관념론으로 사물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우리가 수평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수평선이 된다.)
다시 한번 폴 세잔의 그림을 살펴보자.
풀 세잔의 다른 그림을 봐도 마찬가지다.
테이블의 선이 미묘하게 어긋나 있다.
인간의 인식체계를 넘어서서 세상을 바라보는 통찰이다.
폴 세잔은 입체파(피카소)와
포스트 모더니즘 시대를 알린 예술가이다.
쇠락의 서커스는 병치 혼합으로 색을 표현한 작품이다.
쉽게 말하면 색을 섞어서 그린 게 아닌 점을 찍어서 그렸다.
가까이서 보면 확실하게 색이 구분되어 있지만
멀리서 보면 눈의 망막에서 착시되어 자연스럽게 보이게 된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모니터 및 액정은 픽셀이라는 단위로 이미지를 표현한다.
'오귀스트 르느와르 ; 도시 무도회(좌), 시골 무도회(우) -상단-'
'오귀스트 르느와르 ; 물랭 드 라 갈레트 무도회 -중단-'
'귀스타브 쿠베르 ; 오르낭의 장례식 -하단-'
르느와르의 작품을 보면 현실은 언제나 행복함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하고 있다.
특유의 색채와 인체 표현이 두드러진다.
사실주의의 대표적인 작품인 '오르낭의 장례식'은
인간의 간사함과 시기심이 잘 표현돼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실주의'는 사물을 정확하게 표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계급 갈등과 차별 등 현실을 비판하여 반영한다는 뜻이다.
사실주의는 이후 구소련에서 체제 유지와 정치 선동의 도구로 사용되었다.
'클로드 모네 ; 수련 -상단-'
'클로드 모네 ; les Glaçons(좌), 까미유 부인의 죽음(우) -중단-'
'에두아르 마네 ; 풀밭 위의 점심식사 -하단-'
모네는 주관적인 느낌을 객관적으로 표현한다.
물감의 질감, 색의 혼합 등 빛의 다채로움을 보여준다.
멀리서 보면 부드러운 느낌을 주지만 가까이서 보면
상당히 거친, 힘 있는 필력이 느껴진다.
마네는 평면인 캔버스에서 독특한 명암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인물이 정면을 바라보는 구도가 많다.
영화에서 배우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관객과 눈이 마주치며 불쾌함을 주기 때문이다.
피사체가 관객을 향해 눈을 마주치는 것은
직접적인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된다.
마네는 관객에게 자신의 비판과 저항 정신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장 프랑수와 밀레 ; 양치는 소녀와 양떼 -상단-'
'장 프랑수와 밀레 ; 이삭 줍는 여인들 -중단-'
'빈센트 반 고흐 ; 고흐의 방 -하단-'
밀레의 작품은 목가적인 풍경이 눈을 사로잡는다.
또한 밀레의 작품은 현실의 부조리함을 투영한다.
사실주의에 영향을 받았으며 고흐의 초기 작품에 영향을 주었다.
유명한 고흐는 후기 인상주의로 분류된다.
고흐의 삶을 그려보면 조커의 광기가 겹쳐진다.
고흐가 미술에 집착해서 다행이지, 만약 다른 길을 택했다면
연쇄살인마로 이름을 남겼을지도 모르겠다.
인상주의 이후에 나타난 후기 인상주의의 작품들은
다양한 빛(색채)과 다양한 관점을 제시한다.
미학과 철학은 인간이 사물(현상)의 자극에 대한
관점의 변화를 이끈다.
후려쳐서 말하면 감성과 이성 중 어느 것이
우선하여 판단하고 행동하는지를 설명한다.
예술과 철학은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렌즈 색을
보여주고, 의구심을 갖게 한다.
'길에서 본 성당 -상단-'
'SOLFERINO 지하철 역 -중단, 왼쪽-'
'Abbesses 지하철 역 -중단, 오른쪽-'
오후가 되어 몽마르뜨 언덕으로 이동했다.
'몽마르뜨 언덕'에 있는 '사랑해 벽'을 보려면
Abbesses 역에서 내리는 게 편하다.
알아둬야 할 건 Abbesses 역에서 지상으로
나오는 계단이 나선형(사진 ; 중단, 오른쪽)으로 되어 있다.
계단을 오르다 지칠 정도로 매우 길다.
구글맵에서 '몽마르뜨 언덕'을 검색하면
공동묘지로 갈 수 있으니 '사크레쾨르 성당'으로 길 찾기를 해야 한다.
'몽마르뜨 언덕으로 가는 계단 -상단-'
(계단 옆에 푸니쿨라가 보인다.)
'사크레쾨르 성당 -하단-'
몽마르뜨 언덕은 푸니쿨라를 이용하여 편하게 오를 수 있다.
나비고 카드로 이용 가능하다.
계단으로 올라가는 경험도 나쁘지 않다.
계단을 다 오르면 하얀 성당이 보인다.
1870년 보불전쟁(프랑스-프로이센 전쟁)의 승리를 기원하는
신자들의 모금으로 지어졌다고 한다.
'성당에서 보는 파리 시내 -상단-'
'면사포를 쓴 웨딩 촬영 -중단-'
'사크레쾨르 성당 내부 -하단, 왼쪽-'
다행히 비는 오지 않았지만
파리의 날씨는 방심할 수 없다.
먹구름이 푸른 하늘을 가리는 현상을 목도했다.
(곧 비가 온다는 뜻이다.)
'대부분 생각하는 몽마르뜨 언덕 -상단-'
(몽마르뜨 언덕은 공동묘지다.)
'테르트르 광장 -중단, 오른쪽-'
몽마르뜨는 순교자의 시체를 쌓아두었던 언덕이다.
실제로 사크레쾨르 성당 서쪽에 공동묘지가 있다.
이곳은 19세기 초까지 풍차가 도는 시골 마을이었으나
20세기에 저렴한 생활비 때문에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고흐와 피카소도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사크레쾨르 성당에서 화가들이 있는 광장을 보려면
서쪽 방향으로 이동해야 한다.
몽마르뜨 언덕을 내려오면 다시 올라가야 하는 불상사가 생긴다.
필자는 나비고 카드를 이용하여 푸니쿨라를 이용해 올라갔다.
다시 계단을 이용해서 오르려니 눈앞이 캄캄하다.
서쪽으로 이동하면
테르트르 광장과 물랭루즈, 갈레트의 풍차 등을
볼 수 있다.
몽마르뜨 언덕은 예상외로 시간이 많이 소비된다.
'Lamarck Caulaincourt' 역에서 여행을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해가 지면 물랭루즈(유흥, 1889년 개장한 카바레)의
화려함을 끝으로 하는 일정을 추천한다.
물랭루즈는 19세기에 매춘과 마약이 행해지던 곳이다.
1903년에 영화관으로 변모했다가 다시 공연장으로 바뀌었다.
'마르스 광장 [평화의 벽] -상단-'
'에펠탑 -중단-'
'샤틀레 역 인근의 생뙤스타슈 성당 -하단-'
에펠탑을 볼 수 있는 마르스 공원을 갔다.
마르스 공원 초입에 '평화의 벽'이 있다.
여러 언어로 '평화'라고 쓰여 있다.
한글도 있다. 하지만 독일어와 일본어는 없다.
한국전쟁 이후 한국에서 평화는
일상이 되었다.
너무 당연한 일상이라 조선(북한)에서
미사일을 발사해도
담담하게 일상 생활을 한다.
현재 논란이 되는 이슈들,
예를 들면 공수처 설치, 노동권, 교육, 인권 등은
모두 평화에 기반하는 논쟁과 갈등이다.
여러 가지 정치 사안과 사회 갈등은
포탄이 떨어지는 전쟁 속에서는 의미가 없다.
전쟁을 쉽게 말하는 위정자는 시민의 권한을 대리할 자격이 없다.
극단적인 상황을 이용하는 정치인은 민중의 피를 담보하여
권력을 취하려는 살인자다.
전쟁을 선동하는 건 늙은 노인이지만
피를 흘리는 것은 젊은 세대이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전쟁을 피하는 선택을 하는
지혜로움이 필요하다.
지구에 존재하는 국가는 대략 300여 국이다.
한국의 군사력, 경제력, 시민 의식은 세계에서
10위권 안팎에 위치한다.
한반도 주변에 강대국들로 둘러 쌓여서
상대적으로 약소한 나라로 보일 뿐이다.
어지간한 나라가 싸움을 걸어올 수도 없고
여러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쉽사리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어렵다.
현재 한국의 주요 담론은 사회안전망(복지)라고 생각된다.
높은 자살률, 고용 안정, 주거, 공교육, 노동 시간 등
OECD 평균에도 한참 모자라는 수준에 이르고 있다.
OECD의 GDP 대비 복지지출 비율은 20% 정도이며,
한국은 11%(2018년 기준) 정도이다.
이 수치는 29개국 중 꼴찌다.
자유시장주의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복지를 늘리면
노동생산성이 낮아지고,
무임승차는 정당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과도한 국가부채는 망조라고 선동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의 노동생산성은
독일, 프랑스보다 현저히 낮다.
노동시간 대비 생산력이 떨어진다는 의미다.
삶의 여유와 정당한 보상이 주어지고
친구, 가족, 이웃과의 유대가, 공동체 의식이 깊어질수록
직장에 대한 애착과 동료와의 협력은
증진될 가능성이 크다.
또한 인간은 재화를 생산하는 기계가 아니다.
자본에 충실한 노동을 안 한다고 해서
행복하게 살 권리가 없는 건 아니다.
더욱이 삶이 안정되면 인간은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 일을 하게 된다.
비록 그 행위가 GDP에 포함되지 않을 뿐이다.
인간의 경제 활동은 이미 그림자 노동(돌봄, 가사 노동 등)에
무임승차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면
보수주의 경제학에서 노동 가치의 일면만
부각하는 주장이다.
필자는 개인의 노력과는 무관하게 평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마땅히 노력한 사람은 그 대가를 가질 자격이 있다.
우려하는 건 평범한 사람이 평범하다는 이유만으로
벌을 받아야 하는 노동 시장이다.
인간은 쓸모가 없어지거나 노후됐다고 폐기 처분할 수 있는 상품이 아니다.
누구나 당신과 같은 감정을 느끼며 살아가는 인격이다.
한국의 국가부채는 GDP 대비 40% 정도다.
국가부채의 적정성은
세계적인 경제학자도 결론내기가 어렵다.
일본은 정부 부채가 250%가 넘으며,
미국은 100%가 넘는다.
독일은 80%, 프랑스는 120%, 스웨덴은 51%가 넘는다.
한국의 정부부채비율은 낮은 편이다.
오죽하면 시장경제의 화신인 IMF 신임 총재
크리스탈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 첫 공식 연설(2019년 10월 8일)에서
'한국'이라고 콕 집어 정부부채를 늘려 재정 확대하라고 권했겠는가.
개인 부채와 정부 부채는 의미가 다르다.
수구 언론에서 부채에 대한 공포감을 조장한다 해도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다.
경제 전문가들이 말하는 경제 이론은 해답이 아니다.
경제학은 과학이 아니라 문학에 가깝다.
복잡한 데이터와 수식으로 그럴싸해 보이지만
인간은 합리적으로 선택하지 않는다.
언제나 감정이 일치되는 지점에서 선택을 하게 된다.
인간은 이기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이타적으로 진화했다.
다양한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황이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생각한다.
기득권의 반발이 거세지만 결국에는
균형을 찾을 것이라 생각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마르스 광장에서 날씨가 좋으면
잔디에 누워 에펠탑을 보며 와인이나 맥주를 마실 수 있다.
앉아 있으면 음료(또는 술)를 파는 상인이 다가온다.
상인들은 간단한 한국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마르스 공원에서 운동을 하는 현지인들도 많다.
공원에서 조깅하는 여인을 살짝 피해 주었더니
미소를 띠며 나의 눈을 바라보고 'Thank you'라고
속삭이듯 말하고 지나쳤다.
매우 작은 목소리로 'You're welcome'이라 말하고
눈인사와 미소로 답례하였다.
별것 아닌 일상의 일인데
에펠탑 아래에서 미모의 여인과 나눈 짧은 인사가,
그 찰나의 장면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아무래도 나는 프랑스 여자가 취향인가 보다.
샤틀레역으로 돌아오니 노을이 지고 있었다.
다시 해가 진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만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인지한다.
다수의 렌즈는 자본주의, 자유주의, 효율, 경쟁, 가족, 집단 등이 있다.
소수의 렌즈는 사회주의, 평등, 존중, 공동체, 협동 등이 있다.
어떤 렌즈를 이용하여 세상과 소통하건 잘못된 점은 없다.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면 된다.
문제는 자신은 렌즈를 끼고 있지 않으며, 자신의 생각과 판단은 공정하고 합리적이라고 믿는다.
자신의 렌즈는 진실이라는 신념을 버리지 않는다.
사회 갈등은 세계를 바라보는 렌즈의 차이로 발생한다.
편견이 없던 아이는 사회에 적응하며 신념이 생긴다.
주류 사회의 마지막 끈을 잡고 힘겹게 살아가면 마침내 사고를 멈춘다.
차이와 차별을 구별하기를 거부한다.
혐오와 증오를 정당화한다.
다름과 틀림을 분별하지 못한다.
자신의 손에 칼이 들려 있다는 생각을 못하고
먹잇감을 찾듯 사회적 약자를 짓밟는다.
세상을 바라보는 혜안과 통찰력을 얻는 방법은 방대한 지식이나 지성이 아니다.
끊임없이 사유할 수 있는 의지와 진실, 그리고 변화를 인정할 수 있는 작은 용기다.
세상은 지금보다 행복하게 변할 수 있다.
그대와,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 또는 그대의 친구가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구가할 수 있다.
당신이 작은 용기를 잊지 않는다면 반드시 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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